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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지난뉴스레터보기 발행인:이배영  편집인:추기석, 강은주, 김진영          News Letter Vol.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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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RIUM

이헌 교수님 연수후기- In the middle of the Deep South under Pandemic
순천향대 부천병원 영상의학과

새로 얻은 연수 기회에 Cardiac MR을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하고 경험을 쌓기 위해 세계 여러 곳을 알아보던 중, 갑자기 미국의 South Carolina의 MUSC (Medical University of South Carolina)가 검색되었다. 이곳은 13년전 내가 Cardiac CT를 공부하러 1년 머물렀던 곳이었고 최근까지도 이곳의 Cardiac CT research 책임자인 Dr Schoepf와 꾸준히 접촉을 하고 있었지만, Cardiac MR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지는 알지 못했었다. 여러 곳을 놓고 저울질하던 나는 다른 곳으로도 가보고 싶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고 익숙한 곳을 택하게 되었다.

MUSC는 미국의 Deep South 지역인 South Carolina의 Charleston city에 있는 Public University로 1824년에 설립되었고 6개의 단과대학으로 이루어져 있는 유서 깊은 남부의 대학이며 medical school은 2021년 research와 primary care분야에서 각각 58위와 88위에 rank되었다. Charleston city은 South Carolina의 제1의 도시로 대서양과 접해 있는 인구 14만의 해안도시이며 주변의 도시, west Ashley, North Charleston, Mount Pleasant를 포함한 Charleston county의 인구는 약 40만을 넘는다. Charleston은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의 중요한 항구였으며 실제로 남북전쟁의 첫 전투가 벌어진 Fort Sumter가 이곳에 있다.

이전에 내가 살던 곳은 Mount Pleasant의 condo로, Charleston county의 신도시 겸 교육도시로 젊은 중산층의 주거지로 인기있던 곳이었지만, 이번에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없고 강아지를 동반한 관계로, 병원에서는 가깝지만 집세가 좀 더 저렴한 Backyard가 있는 House를 택했다. 더욱이 정원 손질이나 잔디 관리는 집주인들이 마을 community를 통해 관리회사에 위탁하기 때문에 세입자는 이런 면에서는 주택에 사는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도 큰 몫을 했다. 집은 70년이 되어 관리 상태가 좋은 편이긴 했지만 좀 낡아 있었다. 하지만 도착 다음날 이웃들로부터 받은 환영카드와 선물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자신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메모들은 이런 찜찜함을 해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웃들은 수다스럽지만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우리가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이것은 전에도 느꼈지만 전형적인 남부사람들의 사무적이지 않은 따뜻한 관심이라 생각한다. COVID-19로 출근을 못하고 강아지를 데리고 하루에 한 두번씩 마을 산책을 하는 게 나의 일과가 되었을 때, 난 사실 이웃들이 다가와서 웃으며 인사하고 말을 거는 게 겁이 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미국에서 유행 초기라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었고, 우리도 눈치보여 마스크를 쓰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때, 한숨 돌린 한국의 방송과 신문에서는 미국의 사재기, 물자부족, 동양인에 대한 혐오, 총기구입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고 그걸 보는 우리 가족은 “곧 미국이 망할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다 가도 우리가 미국에 있다는 현실로 돌아오면 주변의 평온한 상태에 놀라곤 했다. 하지만 4월 이후 COVID-19가 점점 심각해지고 이웃들의 입가에 웃음이 사라지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Toilet paper 부족이었다. 지금도 왜 사재기의 대상이 그것이었는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아마도 자연재해를 자주 겪는 미국인들의 오래된 쇼핑 습관이라는 설명이 유력하다 (Toilet paper와 mask filter의 재료가 같다는 루머도 있지만...).

이 기간 우리의 이웃에게는 도움을 받으면 마스크나 toilet paper로 보답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주말에 마트에 갈 때 고맙게도 우리의 주문을 받아 사다주는 이웃에게 우리가 마스크로 보답한 게 시초였을 것 같기도 하다. 3월 중순의 어느 금요일, 이 지역에서 첫 환자가 나왔다는 소문이 병원에 돌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으로 주말 잘 보내라, 월요일에 보자하고 퇴근했는데, 그게 마지막 출근이었다. 그 주말 새, 월요일부터 출근하지 말고 집에 머물러 있으라는 메일이 왔다. 모든 Researcher에게 해당하는 말이 였고, 당일 환자 보지 않는 의사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말이었다. Radiology department도 역시 당직 개념으로 1-2명, intervention시술자 등을 제외하고 전원 집에서 일하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미국은 의료기관이 아닌 자택에서 판독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나는 3월 이후 시작하기로 된 study는 시작하지 못했고 2월에 막 시작했던 cardiac imaging에서의 artificial intelligence (AI) technique의 적용 관련 review article 두 편을 집에서 느릿느릿 써 나가면서 우리 research 팀의 전담 reviewer(?)처럼 많은 논문의 심사를 맡았는데, 덕분에 참 여러 COVID-19관련 초기 논문을 읽고 더 많은 걱정을 짊어질 기회를 갖게 되었다.

Coronary calcium scoring과 Plaque characterization, CT FFR에서 AI의 적용은 이 연구팀에서 최근 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주된 topic이라 논문 작성과정에서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1주일에 1회 약 15명 정도 모이던 연구팀은 재택 근무중에도 역시 1주 1회 모여 연구의 진행상황을 발표하고, 점검하며 토론하는 기회를 Zoom을 통해서 갖게 되었다. 연구팀은 심장/흉부 section의 Radiology와 cardiology faculty및, Researcher, Research coordinator로 구성이 되는 데, Research coordinator, 즉 연구 보조자로 일하면서 연구와 논문에 참여하여 경력을 쌓아 최종적으로 의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현지인 (미국인) 학사 출신을 제외하고 주된 Researcher인 MD들은 거의 외국인, 특히 유럽 중, 독일어 권 나라 교수들이 대부분이었고 Coordinator와 마찬가지로 경력을 쌓아 미국에서 전공의 과정에 지원하려는 중남미와 중동 출신 MD등도 몇몇 있었다.

전체 연수 기간을 통해서 초기 며칠간 출근하지 않았을 때 난 참 행복했지만, 집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내 불안해졌다. 정확히는 미국의 소식을 전하는 한국의 방송 때문이다. 뭐, 방송이라는 게 일반적인 상황보다는 극단적인 것을 뉴스거리로 취급하긴 하지만 말이다. 혹시 가족 중 누가 아프면 어떡하지? 어디서 COVID-19 test를 받아야 할까? 병원에 가면 병원 기능이 유지되어 있을까? 등등, 지금 보면 너무 많은 걱정거리가 있었다. 거기다 George Floyd의 죽음 후, 시작된 Black Lives Matter시위와 폭동, 약탈 소식들과, 나도 실제로 영향 받았던 curfew명령등으로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할 일들을 연달아 겪고 있으면서 강아지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좀 있었다.

이번 연수기간에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 알찬 시간을 보내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주로 집에만 머물게 되면서 평상시라면 느끼지 않을 고립감을 pandemic period에 그것도 타국에서 느낀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물론 여기 MUSC에 와 있었던 타국의 연구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에게는 언어나 문화 등에서 미국생활이 타국이 아닌 마치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사람이 강원도나 전라도 사투리가 심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다행히 미국 여기저기에 연수하고 있는 한국의 선생님들과 연락이 되면서, “나랑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올해 2-3월에 미국에 연수와 초기 정착도 못하고 귀국한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훨씬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한국인이 거의 살지 않은 이 지역에서 우리 가족에게 또 다른 위안을 주신 분은 어릴 때 공부하기 위해 한국에서 미국에 건너와, 유태계 미국인 남편과 결혼해 살고 계신 realtor 할머니로, 그분은 틈틈이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챙겨 주시고 우리가 떠나기 전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집에 초대해 저녁식사까지 대접해 주셨다. 그분과 얘기를 나누면서, 어린 시절 단신으로 미국에 건너와 지금보다 심했을 여러 가지 차별을 견디며 살았을 세월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 나에게 느껴진다. “조심은 하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너무 움츠려 들지는 마라”.

한국에서 격리 중에 하, 얼마전 하나, 2개의 review articles이 publication된 것을 확인했다. 이런 와중에도 일상은 진행되는 것이 신기하다. 이 Pandemic이 진정되면 얼른 가서 작별인사도 못하고 온 사람들과 다시 만나 제대로 인사하고 싶다.

뜻하지 않게 내 일터가 되어 주었던 우리집 뒷마당.

매일 우리집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해서 너무 익숙한 우리 동네. 빨간 픽업트럭집 할머니는 지금 잘 계시나 모르겠다.

장보러 가면서 내 부탁으로 맥주를 사다 준 옆집 psychologist에게 마스크 5장을 선물했을 때 온 문자 메세지. 그녀의 당황스러운 상황이 묻어나온다.